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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를 만나다] 해밀턴 아이언워크스 한나남대표…철강업계선 흔치 않은 '철의 여인'

'해밀턴아이언 워크스'라는 철강업체를 경영하는 한나 남(49) 대표는 철강업계의 흔치 않은 여성 CEO다. 해밀턴사는 W빔(한국선 I빔)으로 알려질 철골을 건물 형태에 맞게 자르고 변형시켜 납품하는 업체다. 가디나의 2에이커가 넘는 공장부지에 7.5톤짜리 크레인 3개 5톤짜리 크레인 2개 각종 밀링머신 등의 시설을 갖추고 다양한 공사 주문을 소화해 내고 있다. 이미 LA국제공항 위티어 장로병원 더글라스 파크 페퍼다인 대학 등 굵직굵직한 신축 및 확장 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주류업계에 확실한 인상을 심어줬다. "사실 철강업계는 유색인종의 진입이 쉽지 않고 더구나 여성 CEO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금녀의 산업분야죠. 학교에서 따로 배워서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 현장 경험을 중시하고 각종 공사 규격이 까다로워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아요." 17세에 고향 부산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온 남 대표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다 결혼 후 육아에 전념하던 그를 철강업계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남편의 공(?)이다. 동업자가 떠난 소규모 철강업체를 인수한 남편이 남씨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20년 전 처음 오픈할 때만 해도 한인타운에 진출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게 오히려 주류 공사로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큰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납품 경험과 제작 능력이 입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규모를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공사 수주를 따냈다. 그러다 1996년 LA국제공항 확장 공사에 참여하면서 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까다로운 공항 공사에 입찰하기 위해 각종 서류 작업에서부터 시공 능력 직원 관리 등을 통해 전반적으로 회사 체질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전에는 소수계 비즈니스를 지원하는 정책(MBE)으로 인해 참가하게 됐지만 이를 계기로 시공 능력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중소 철강업체로는 드물게 직원들에 생명보험과 의료보험 혜택을 주는 등 직원 복지를 강화했다. 또 공사가 많다고 함부로 직원을 뽑기보다 오버타임을 주더라도 기존의 직원에게 혜택을 주는 방법을 택했다. 'FB01380'. FB(Fabricator licence)란 LA시가 허가해 주는 철골 제작 라이선스로 남 대표가 취득한 자격번호이다. LA시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남씨가 취득한 것이다. 주에서 발급하는 구조 철골 자격증 C51(Steel Structural)도 보유하고 있다. 현장 경험이 5년이상 되어야 하고 각종 기계를 운영하는 지식을 갖춰야 합격할 수 있어 여성은 시험 응시자도 찾아 보기가 힘들다. 최근 부동산 경기 침체로 건설 공사도 감소하면서 해밀턴사도 그 여파를 고스란히 맞고 있다. 수년 전보다 공사 실적이 거의 절반 가량이 줄었지만 남 대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찾아온 휴식을 여유있게 즐기고 있다. 작년부터 남편과 함께 골프를 배우기 시작한 것도 한인사회에 봉사의 기회를 살펴보게 된 것도 오랜만의 불황 덕분이다. 해밀턴사는 올 하반기부터 로욜라 대학 성소피아 성당 확장공사 준비로 다시 바빠지게 된다. 노란색 안전모를 집어들고 공사 현장으로 향하는 남 대표가 이렇게 말한다. "능력있는 한인 여성들이 대학 졸업 후 집안에 머무는 게 안타까워요. 미국이니까 어느 분야든지 도전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상태 기자 [email protected]

2010-08-29

[한인 CEO 열전-7] 에어컨 설비회사 '센트럴 텍' 이상민 대표

이 회사는 최근 주류 병원로부터 대형 공사를 따내는 등 오히려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이 회사가 샌타바바러 카운티 소재 골리타 밸리 코티지 하스피털로부터 따낸 공사 규모는 총 800만달러로 최근 완공한 에퀴터블 시티센터의 에어컨 설비 공사가 200만 달러인 것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번 공사를 발주한 회사는 세인트루이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HBE’사로, 미국내 의료빌딩 공사에서 1~2위를 다투는 유명한 회사이다. 주류시장을 파고든 비결을 이상민 대표를 통해 짚어봤다. '불경기가 와도 일이 끊어지지 않는 회사를 만들겠다.' 16년전 '센트럴 텍'을 시작한 이상민(52) 대표의 창업 신념이었다. 이 대표가 '센트럴 텍'을 창업한 1990년대 초반은 지금처럼 어려웠던 시절. 부동산 시장이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실물 경제가 얼어붙었다. 미국에 온 지 10년 에어컨 설비회사에 한 우물만 팠던 그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았다. 입사 2년만에 총매니저가 되는 등 초고속 승진하며 성실성 하나만큼은 인정을 받았던 그는 일감이 없자 월급만 축낸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창업을 하게 된다. 대부분 지인들은 만류했지만 오히려 불경기에 창업을 하게 된 게 전환점이 됐다. 건설공사가 올스톱된 한인타운 대신 주류시장 공략은 '선택'이 아닌 절체절명의 생존 과제가 되었다. ◇에어컨 공사에도 주기가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닷컴 열풍으로 실리콘밸리가 가열됐던 시기였다. 곳곳마다 반도체 설비 공장이 증축되면서 에어컨 공사 수요도 폭증했다. 이씨가 창업한 센트럴 텍이 그 길목을 노려 주류 공사를 연거푸 따냈다. 닷컴 열풍이 잠잠해질 무렵 한인사회에는 대형교회 신축 바람이 불었다. 교회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인원대비 에어컨 용량이 큰 시설을 갖춰야 해 기술 업그레이드에 큰 도움이 됐다. 남가주 사랑의 교회를 시작으로 밸리 비전교회 최근 신축한 은혜한인교회 수양관 등의 에어컨 설비는 모두 그의 회사를 거쳤다. 최근엔 에퀴터블 시티센터 마당 등 대형 쇼핑센터 신축을 눈여겨 보다 공사를 따냈다. 주기를 타면 일감을 찾기가 쉽다는 것도 알게됐다. ◇병원에서 찾은 '블루오션' 매번 새로 공사를 따내야 회사가 운영되는 만큼 마진이 높고 경쟁이 덜한 분야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수년 전부터 고심하다 발견한 것이 병원 쪽이었다. 병원의 에어컨 설비 규정은 일반 빌딩 공사보다 규정이 까다로왔다. 병원이 요구하는 특수한 코드에 맞게 도면을 읽고 공사를 진행할 수 있는 있는 기술력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했다. 2004년 스카이파크 메디컬센터을 시작으로 마틴 루터 킹 병원(2006년) 하버 UCLA 병원(2008년) 에어컨 공사를 잇달아 수주하며 시공능력과 역량을 키웠다. 나중에 알게됐지만 주류 회사일수록 대형공사일수록 이전 실적을 많이 참고한다는 사실이다. 병원 공사 경험이 있는 업체여야 입찰을 할 수 있는 까닭에 경쟁이 덜했고 공사 마진도 일반 공사보다 1.5~2배가 컸다. ◇타인종 직원 고용해야 주류 간다 일반적으로 에어컨 하면 한인들은 막노동 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에어컨 설비 협회나 컨퍼런스에서는 유색인종이 운영하는 회사를 거의 찾기 힘들다. 공사를 수주하거나 시공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을 경험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프로젝트 매니저 서비스 매니저 등 주요 자리를 타인종 직원으로 채용하면서 이같은 고민을 덜게 됐고 오히려 주류회사의 업무 방식을 배우는 계기가 됐다. 또 이들과 일하며 이민 1세인 이 대표가 합리적인 의사결정과 미국 문화를 습득하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다. 또 사장 인맥으로 공사를 따내면서 발생하는 가격 후려치기 편법 공사 등의 문제도 타인종 직원이 관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최상태 기자 [email protected]

2009-12-02

[한인 CEO 열전-6] 미 동부서 네일·스파 체인점 52개 운영····플로리스 인터내셔널 최우진 사장 '럭셔리···부유층 공략 통했다'

플로리스는 미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52개 매장(직영점 11곳)을 운영하며 연매출 4000만달러를 올리고 있는 네일업계의 강자. 불경기가 본격화된 올해에도 작년보다 15% 이상 성장해 업계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플로리스가 내년 초 캘리포니아에 입성한다. 입성 준비에 분주한 최우진 사장(42)을 만났다. 여성스러움의 대명사인 네일숍 52곳을 총지휘하는 전략이 모두 그에게서 나온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우선 남자이고 대학 전공도 경영학. 졸업 후에도 네일샵과는 거리가 먼 부동산 개발 전문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쇼핑몰의 성공여부는 입점 업소에 달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부가가치와 단골 확보가 높은 네일숍에 주목하게 됐다. 기존의 네일업계는 베트남계가 섬세한 손놀림과 서비스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규모가 작고 시설투자를 하지않아 영세성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는 네일숍도 매장을 고급스럽게 꾸미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면 주류시장에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소득 수준도 높은 곳을 중심으로 처음부터 철저히 주류 시장을 타겟으로 삼았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데 여유가 있어야 손톱 다듬는 데 돈과 시간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개인 소득 평균 8만 달러 이상인 부유층 지역 내 쇼핑센터 입점 ▷규모 5000~8000스퀘어피트의 대형 매장 ▷헤어와 스파를 겸할 수 있는 원스톱 서비스라는 플로리스의 컨셉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오게 됐다. 최 사장은 업소가 들어서기 전에는 해당 지역에 대한 철저한 시장조사와 고객들의 성향을 파악한다. 주류 스파들을 발이 닳도록 다니며 타인종들이 선호하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도 철저히 점검했다. 또 경험있고 유능한 건축가들에게 인테리어 작업을 맡겨 고급스런 실내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신경을 썼다. 네일샵은 여성에겐 단순한 치장을 떠나 일종의 휴식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네일숍에 대한 고객의 반응은 대단했다. 97년 뉴욕에서 첫 가게를 시작한 이후 뉴저지 코네티컷 펜실베이니아 등으로 확장되더니 최근 5년새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52개 매장 중 매출이 가장 적은 곳이 80만달러며 많이 버는 곳은 350만 달러에 달하는 곳도 있다. 이처럼 동부에서 든든한 조직을 구축한 플로리스는 내년에는 캘리포니에도 본격 진출한다. 우선 베벌리힐스와 팔로스버디스 라캬나다 할리우드 등을 중심으로 '키 체인(key chain)' 역할을 할 업소 부지를 물색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시장를 '네일업계의 블루오션'으로 평가한다는 최우진 사장은 "날씨는 물론 인구 수가 많은 캘리포니아는 페디큐어 시장만 놓고 봐도 뉴욕 시장의 20배에 달한다"며 "성장 잠재력은 무궁한 편"이라고 말했다. 또 자체 네일기술 학원을 설립해 숙련된 인력을 확보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에도 진출했으며 중국에도 상류층을 겨냥해 대형 고급업소를 오픈할 예정이다. 이같이 쉴새없이 몰아부치는 그의 추진력과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그의 대답은 짧고 명쾌했다. "전세계 사람들의 손톱은 매일 조금씩 자라기 때문이죠." 최상태 기자 [email protected]

2009-11-04

[한인 CEO 열전-5] 팔레스뷰티·소향 신디 조 사장, 업소 14개···"돈보다는 성취감"

타운 외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업소까지 세자면 팔레스뷰티 리틀도쿄·다이아몬드바·어바인 그리고 선라이즈 매장 등 4개가 추가돼 14개가 된다. 주인공은 신디 조 사장. 남편 조병덕 사장과 함께 14개나 되는 업소를 운영한다. 이쯤 되면 스몰 비즈니스계의 거물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최악이라는 불경기다. 한 공인회계사에 따르면 올해들어 LA한인타운에서만 문을 닫은 식당이 30개가 넘는다. 하지만 조 사장의 비즈니스는 주춤하기는 커녕 무섭게 뻗어나가고 있다. 1년 전 요식업에 도전하며 새롭게 오픈한 소향은 이제 비즈니스 미팅을 위한 식당으로 꼽힐 정도로 자리잡았다. 그를 지난 6일 만났다. 소향을 오픈한지 꼭 1년이 되는 날이었다. ◇네자매 이야기= 신디 조 사장은 82년 미국에 유학왔다. 역시 유학와 MBA를 공부하던 남편 조병덕 사장을 만나 84년 결혼했다. 그는 일본 브랜드 금화장품의 직원으로 남편은 가주은행 론오피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나드리 코스메틱 USA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화장품을 배워갔다. 팔레스뷰티를 차린 건 86년. 한남체인 옆에 첫번째 매장을 냈다. 매장을 확장해 가든그로브 토런스 등 9개 매장까지 일궜다. 2002년엔 팔레스 미용대학을 개원했다. 미용 대학에 집중하기 위해 2004년 1호점만 남기고 각 매장의 소유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 다시 시작한 건 2005년 즈음부터. 허전해서였다. 그리고 4년 만에 이전보다 많은 매장을 냈다. 지금은 남편 언니들과 함께다. 팔레스뷰티 다이아몬드바와 어바인 그리고 선라이즈 매장은 큰 언니와 공동으로 풀러턴은 둘째 언니 IB플라자 매장은 셋째 언니가 소유하고 있다. 팔레스뷰티라는 이름으로 10개(코리아타운 갤러리아 매장은 주인이 다르다) 미용학교까지 11개를 거느린 화장품 패밀리다. ◇미션 임파시블= 화장품 판매 기업으로 키운 성공 포인트는 미션이다. 조병덕 사장은 판매 장사 외에 다른 미션을 세운다. 화장품 판매도 중요하지만 고객의 아름다움을 책임진다는 미션을 마음에 새겼다. 식당을 하면서는 음식 장사를 넘어 고객에게 건강과 행복을 선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사실 매장을 늘리고 사업을 불리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건 아니다. 윌셔+버몬트 시티센터 솔레어 등 현재 타운내 주요 쇼핑몰에는 대부분 팔레스뷰티가 들어가 있다. 조 사장 부부도 처음 시작할 때는 열심히 건물주를 따아다니며 자기소개서와 사업계획 마케팅 전략을 담은 서류를 제출하고 20대 1 25대 1의 경쟁률을 뚫고서 입점했다. 지금은 건물주가 먼저 입주를 제안해온다. 그동안 크레딧이 쌓인 것이다. 팔레스뷰티라는 브랜드 파워도 커졌다. 신디 조 사장은 그냥 지갑 안에 내가 쓸 수 있는 만큼의 돈만 들어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더 바랄 것도 없는 이다. 신디 조 사장이 사업을 늘리는 것도 요식업에 도전한 것도 돈보다는 보람 성취감 때문이다. 보람과 성취감은 그에게 있어 미션이다. ◇돈은 사람이 벌어준다= 업소가 많아 그도 어디 있는지 하나하나 대지 못한다. 한 업소에 한시간씩만 가 있는다 해도 다 돌지 못할 정도다. 어떻게 그 많은 매장을 관리할까. 신디 조 사장은 매장을 일일히 보고 관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했다. 그는 미용이건 헤어건 네일이건 기술도 없고 자격증도 없다. 식당도 마찬가지다. 요리실력이 별로다. 전문가들 앞에서 잘난척 해봐야다. 대신 적임자를 찾는다. 적임자라고 판단되면 믿고 맡긴다. 그리고 직원에게 내 생각을 내 계획을 이해시킨다. 직원의 기술과 실력 노하우를 인정한다. 직원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그러면서 내 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직원들이 그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니까. 신디 조 사장은 서포터다. 그는 각 매장 각 사업을 자식처럼 여긴다. 아픈 자식을 살리고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하게 하고 그리고 어른이 되게 하는 서포터다. 잘 나가는 자식은 더 잘나가도록 지원한다. 소향이 어느 정도 자리잡았다지만 재투자한다. 연꽃잎 정식은 지난 추석 그야말로 히트를 쳤다. 하지만 다음 작품을 준비한다. 잘 될때 그 다음을 준비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운전대를 잡으면서 생각해요. 오늘은 어디부터 갈까. 흥분(exciting)되죠. 그 흥분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새로운 도전 생각만으로도 익사이팅합니다." 이재희 기자

2009-10-07

[한인 CEO 열전-4] 나노웰 션 이 대표 '브랜드가 곧 돈…5년후엔 기업 공개'

건강식품 시장에서 ‘알쓰맥스’ 바람을 일으키며 급성장하고 있는 ‘리빙포레스트/나노웰’의 션 이 대표는 “막막한 상황에서 시작한 사업이 커졌다”며 “기업을 공개해 고객이 회사의 성장에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개념의 쇼핑센터를 내세운 ‘네이버스’(Nabors)를 오는 12일 오픈할 예정이다. LA한인타운 웨스턴과 올림픽 코너에 위치한 네이버스 공사현장에서 션 이 대표를 만났다. Q. 불경기에도 공격적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A. 필요하면 투자하는 것이다. "광고든 사업 확장이든 돈이 있어서 하는게 아니다. 필요하면 가치가 있다면 투자하는 것이다. 대신 돈 이상의 것 나노웰이란 브랜드를 얻었다. 그동안 제품을 팔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다. 사실 돈은 못 벌었다. 나는 집도 없다. 아파트에 산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나노웰 제품을 믿고 산다. 나노웰이란 브랜드를 신뢰하고 인정한다. 가치를 인정받은 브랜드는 곧 돈이다. 내 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없지만 내겐 손에 잡히지 않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이 생겼다. 이는 돈보다 더 큰 것이다." Q. 나노웰이 성공한 비결은. A. 가격을 내리고 열심히 알렸다. "건강식품 시장에 발을 내딛였을 때 당시 제품 유닛당 가격은 120~150달러였다. 유사한 제품을 35달러에 파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노웰 제품의 70~80%는 69달러 선에 책정한다. 가격을 절반 수준으로 낮췄다. 내가 중요시하는 것은 돈 있는 소수를 위한 제품이 아니다. 1달러짜리 제품의 가치는 1달러 혹은 그 이하라고 볼 수 있다. 내 욕심은 10달러짜리 제품을 누구나 접할 수 있게 5달러에 소개하는 것이다. 대신 나노웰 제품에 대한 품질과 효과를 인정받는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제품 개발과 생산 공장에 투자를 했고 품질과 효과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광고를 했다." Q.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A.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26살 때부터 비즈니스를 하기 시작해 수산가공 및 육가공 수출입업 건축자채 및 기계설비 컴퓨터 하드디스크 수입 마켓 운영 등 6~7개 업종에서 11개 사업체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사업에 실패했다. 한국에서는 재기가 힘들다. 미국쪽 거래처에서 '미국에 와라. 이곳에서는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겠냐' 했다. 그래서 쉬러 재충전하러 그리고 도전하러 미국에 왔다. 그러다 계획엔 없었지만 눌러앉았다. 97년 미국에 와 나이(당시 40살)도 있고 육체적으로 하는 일은 힘들었다. 머리를 써서 할 수 있는 일.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 엔지니어 수요가 높다고 했다. 일자리 수요는 30만개인데 자격증 있는 엔지니어는 10만명이라고 했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니 되겠다 싶어 105일만에 6과목을 패스하고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놓친 게 있었다. 내 상태였다. 내 나이 내 영어구사력 등. 취직이 안됐다. 막막한 상황이었는데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 붐이 불었다. 웹사이트 만드는 법을 혼자 공부해 터득했다. 99년 가주영어학교 웹사이트를 제작해줬고 2001년 SSLIT라는 회사를 차렸다. 한미은행 윌셔은행 등에 이어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 한남체인 JC세일즈 등으로 클라이언트가 늘었다. 많을 때는 어카운트가 200개 정도 됐다. 지금도 기존 클라이언트의 광고 모니터는 관리해준다. 사실 나노웰은 제품 광고를 하다 이참에 직접 팔아보자 해서 차리게 됐다. 계획에 없었다." Q. 앞으로 계획은. A. 고객이 주인이 되는 회사를 만들겠다. "한인 이민 100년을 말한다.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 단계에 대한 준비가 돼 있나 물으면 대답 못할 것이다. 이민 1세대 회사 창업주 모두 다음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사라진다. 회사는 괘도에 올랐지만 창업주는 기력이 쇠한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기에 창업주의 수명에도 한계가 있다. 한인 업체는 1인 집중 시스템이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모든 것을 컨트롤 할 수 있지만 은퇴하고 나면, 죽고 나면 없다. 나는 죽지만 회사는 남을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네이버스는 새로운 개념이다. 고객이 주인이 된다. 2010년부터 5년 동안은 사업을 공개할 계획이다. 수입, 지출을 보여줄 것이다. 속을 내보이겠다. 5년 후에는 일반에 주식을 공모할 것이다. 네이버스에서 제품을 사는데 그치지 않고 주인이 되게끔 할 것이다. 주인이 되면 회사에 애정이 생기고 그 회사 제품이 많이 팔리도록 잘못된 점을 지적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은 긴장할 것이다. 고객은 주인으로서 회사 성장을 보며 성취감을 느낄 것이다. 고객이 애착을 보이는 네이버스는 진정한 고객 만족을 향해 갈 것이다.” ◇나노웰은. 2004년 시작해 2005년 매출은 29만달러였다. 2006년에는 9배로 늘었다. 2008년엔 연 매출 800만달러를 기록했다. 30배 가까운 성장이다. 올해는 5월까지 괜찮았다. 6월과 7월은 매출이 감소했다가 8월 예년 수준을 유지했다. 2달 불황을 겪은 것이다. 올 상반기 전체로는 전년동기 대비 30% 매출이 증가했다. 출시 5년 만에 50만병 판매라는 기록을 세운 알쓰맥스가 대표상품이다. 현재 30여가지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글=이재희 기자 사진=김상진 기자

2009-09-02

[한인 CEO 열전-2] '마음경영'으로 소비자·딜러·직원 꽉 잡아

‘냉장고 업계의 도요타.’ 식당 장비 수리에서 시작해 연 매출 1억 달러 규모의 기업으로 고속 성장한 ‘터보에어’를 놓고 미국 상업용 냉장고 시장에서 부르는 말이다. 이 회사의 브라이언 김 대표는 지난 7월1일 한국 대우 일렉트로닉스의 영업용 냉장고 사업부문 인수해 화제를 모았다. 광주시 투자유치단과 투자 MOU를 맺은 지 불과 4개월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이다. 대기업의 설비를 이용해 냉장고를 생산해왔던 미국의 중소기업이 오히려 그 대기업을 인수하게 된 상황이었다. 김 대표는 “셋방살이 하던 사람이 그 집 주인이 됐을 때의 기분”이라고 인수 소감을 말했다. 카슨에 위치한 터보에어 본사에서 만난 브라이언 김 대표로 부터 그의 경영마인드를 들어봤다. 창업 10년만에 업계 2위, 대우 영업 냉장고도 인수 ◇ 공격경영 인수가격 1400만 달러 연내 광주에 공장 설립을 위해 1300만 달러의 추가 투자가 예정된 초대형 프로젝트. 모두가 잔뜩 움츠러들어 있는 불황임에도 그는 과감히 공격적 투자를 선택했다. "엄청난 호황일 때도 망하는 기업은 있기 마련이고 아무리 불황이라 해도 시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지금 터보에어의 규모와 재정 상태는 그 정도 인수로 부담을 느낄만한 수준은 뛰어 넘었습니다. 역동적인 조직과 강한 생명력을 유지해왔다면 이럴 때에도 과감히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김 대표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CEO다. 일상생활에서는 한없이 '연성'이지만 경영자로서는 스스로도 '공격적' '도전적'이라고 평가한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보수적인 상업용 냉장고 시장에서 터보에어를 창업 10여년 만에 시장점유율 30% 판매실적 2위로 키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공격경영 덕분이었다. "중부지역에선 아시아계 기업에 대한 묘한 반감으로 고전하기도 했고 한인 기업이 만드는 제품이라 '약하다'라는 모함에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력을 더욱 높이고 소비자 심리를 파악해 타사 제품과 차별화 시키기 위한 노력을 엄청나게 해 왔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빠른 성장을 해 올 수 있었죠. 요즘엔 터보에어더러 '냉장고계의 도요타'라고들 하더라고요." 현장 수리경험 접목시켜 사용자 만족도 크게 높여 ◇ 분석경영 김 대표식 경영의 또 다른 핵심 중 하나는 '분석'이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나가는 예측과 대비 끊임없는 자체 평가는 지금껏 터보에어가 큰 부침없이 성장을 거듭해 나갈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다. 지금의 경제 위기를 기회로 삼을 수 있었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3년 전 부터 경기불황이 올 것이라 예측했습니다. 그 때부터 직원들과 함께 이 시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 왔었죠." 그는 먼저 브랜드의 가치보다 제품 자체의 품질과 가격에 더 초점을 맞추는 불황기 구매 패턴에 주목했다. 옵션이나 원자재면에서 소비자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일부 제품은 워런티를 높여 소비자 만족도를 높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수금 계좌(A/R)관리를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좋았을 때부터 외상을 축소하고 지불 기한을 엄격히 지키도록 한 결과 불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매주 본사 직원들과 갖는 분석 회의나 3개월에 한번씩 전 지사 매니저급들이 함께 모여 갖는 평가회의는 터보에어의 또 다른 힘. "저 혼자서만이 아니라 직원들과 함께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곳으로 잘 가고 있는지' 수시로 돌아보는 거죠. 아이디어나 전략 평가를 위해서도 중요한 시간이지만 그 동안의 성과를 보여주며 직원들에게 책임감과 보람을 느끼게 하는 데도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 인간경영 브라이언 김 대표는 "경영의 성패는 '사람의 마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달렸다"고 확신한다. 그는 소비자의 마음 딜러의 마음 직원의 마음을 얻는 것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김 대표는 식당 장비 수리에서부터 시작해 현장에서 부딪히며 습득해온 상업용 냉장고 사용자들의 마음을 터보에어 제품에 그대로 담았다고 한다. "쉽게 '만들 수 있는 제품'이 아니라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식당에서 일하시는 여자분들도 힘들이지 않고 여닫을 수 있는 바쁘게 왔다갔다 하다 모서리에 부딪혀도 다치지 않을 재질과 디자인 개발에 힘썼습니다. 손잡이의 감촉 내부 램프와 온도 조절기 사용의 편리함 등도 세세히 신경썼죠." 이렇다 보니 터보에어 제품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게 그의 믿음이다. 단기적 회사의 이익보다는 딜러나 직원들의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경영을 잘 하기 위해선 '분배'를 잘 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들을 대했다. "딜러들이 항상 적정 마진을 남길 수 있도록 구조화했습니다.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터보에어와 관계를 맺도록 만든거죠. 직원들에게도 회사의 이익을 나눠 갖는다는 느낌이 들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번에도 40%씩 여름 보너스를 지급했어요. 자연히 근속률도 높고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남다를 수 밖에 없죠." 그는 끊임없는 긍정적 사고와 더 큰 포부를 통해 자기 자신 또한 '경영'하고 있다. "언제나 마음의 반은 현실에 또 다른 반은 미래에 두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더 좋은 방향' '더 좋은 미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노력의 고삐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85년 도미해 자수성가 ■ 브라이언 김 대표는 1979년 청계천에서 재래식 냉장고룰 수리하며 냉장고 업계에 첫발을 딛었다. 82년 미국식 상업용 냉장고 개발 제조업에 뛰어 들었지만 실패한 후 85년 연고 하나 없이 도미해 새로운 시작을 감행, 냉장고 수리 및 설치 서비스업을 시작했다. 92년 LA한인타운에 ‘삼성식당장비’를 개업해 경영하다 97년 ‘터보에어’를 창업, 매년 30~35%의 고속성장을 기록하며 미국 상업용 냉장고 시장의 강자로 우뚝 서게 됐다. 연매출 1억달러 기업 3개 지사 직원 600명 ■터보에어는 식당, 패스트푸드체인, 편의점, 대형마트 등에서 사용하는 각종 상업용 냉장고를 제조하는 기업으로 칼슨시 본사를 포함 전국 13개 지사에 600여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연매출 1억 달러, 전체 시장 점유율 30% 가량으로 업계 2위의 판매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피자헛, 타코벨, KFC, 스타벅스 등 주요 요식업 체인에 제품을 납품하고 있으며 상업용 냉장고 외에도 상업용 캐비넷, 에어컨, 칼 제조업체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경민 기자

2009-08-02

[한인 CEO 열전-1] 미국서 연간 3000만개 파는 '모자왕' 소네트/플렉스피트 CEO 조병태 회장

◇청년들에게 주는 메시지 -시장조사에 열을 올려라. 리서치는 생명이다. -자신감을 가져라. 모든지 하면 된다. -포기하지 말라. 죽기 살기로 매달리면 실패란 없다. 세계한인무역협회 증경회장이기도 한 조병태 회장은 지난 23일~25일 LA에서 열린 '제6회 차세대 무역스쿨'에 참가한 무역 사관생도들에게 그의 '30년 스토리'를 들려줬다. 참가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1시간여 동안 진행된 '모자왕' 조병태의 '모자에 미친 이야기'에 빨려들었다. 그의 '성공 스토리'를 지면에 옮긴다. #1. 첫 주문이 들어오다= 한국에서 잘 나가던 핸드볼 선수였던 그는 새로운 도전을 꿈꿨다. 1974년 유풍실업에 들어가 모자사업을 배운 그는 1975년 4월 28살의 나이에 뉴욕에 지사장으로 떨어졌다. 도착한 다음날부터 모자 샘플을 가지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시장조사를 했다. 바이어 리스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당시에는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오로지 옐로페이지만을 가지고 바이어를 찾아나섰다. 영어로 간단한 인사 정도 밖에 하지 못한 그는 그래도 무턱대고 전화를 돌렸다. 하루 수십통. 대화가 될 턱이 없었다. "오전9시에 가겠다" "오전11시에 미팅을 하자"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하고 나름대로 스케줄을 짜 무작정 하루 5곳씩 바이어를 찾아갔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바이어를 만난지 6개월. 그동안 500개가 넘는 업체를 방문했지만 주문은 한 건도 건지지 못했다. 그러다 6개월동안 12번은 만난 바이어에게 첫 주문이 들어왔다. 모자 5000개 납품 20만달러짜리 거래였다. 드디어 비즈니스가 시작됐다. #2. 영주권을 맡기다= 하지만 쿼터가 걸림돌이었다. 노-쿼터 제품을 찾았다. 가죽이었다. 가죽 공장에서 버리는 가죽 조각을 수거해 가죽 패치 모자를 만들라고 인건비가 싼 한국 달동네에 보냈다. 모자 생산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리고 물건이 뉴욕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작 물건을 받은 바이어의 거칠게 항의하는 전화를 받았다. 가죽 모자에 곰팡이가 생긴 것. 당시 운송기간은 45일 정도. 운송기간동안 가죽 패치 제작에 사용한 풀에서 곰팡이가 자란 것이다. 성공하는 줄 알았는데 실패였다. 20만달러 빚더미에 앉았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는 바이어에게 영주권을 맡겼다. "반드시 빚을 갚겠다"는 약속과 함께. #3. 허드슨 강변에 서다= 가죽 모자에 실패한 그는 역시 노-쿼터 원단인 린넨에 도전했고 50만달러어치 주문을 받았다. 역시 생산과 운송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물건을 받아보니 린넨 모자는 모두 구겨져 있었다. 린넨의 쉽게 구겨지는 성질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구겨진 린넨 모자는 팔 수가 없었다. 다시 다림질을 하고서야 팔 수 있었다. 하지만 다림질을 하느라 10만달러 빚이 또 생겼다. 두번째 실패. 모자는 아닌가보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허드슨 강변에 섰다. 좌절감이 컸다. 자살을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죽자 하니 무서웠다. "그래 죽을 생각까지 했는데 죽기를 각오하고 다시 해보자." 당시 그는 차가 없었다. 아니 이민와서 쭉 차가 없었다. 지하철로 다녔다. 200스퀘어피트 크기 방 1칸 아파트에 4식구가 살았다. 그 때가 그의 나이 서른. 잠은 5시간만 자기로 했다. ▷백화점을 다니고 쇼를 참관하면서 철저히 시장조사를 하자. ▷더 많은 바이어를 만나자. ▷최고 품질의 모자를 개발해보자. 각오를 다졌다. 한국에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집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다시 시작했다. #4. 아이디어가 먹히다= 당시 광고가 넘쳤다. 하지만 아무도 모자를 광고수단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모자 앞을 광고판으로 이용해보자. 좋은 천에 프린트를 해보자. 바로 그의 첫 히트상품 ‘프린팅’ 모자다. 첫번째 클라이언트는 버드와이저였다. 버드와이저 로고를 모자 앞에 새겼다. 두번째는 말보로, GM과 포드 등 클라이언트가 늘어났다. GM과 포드는 신차가 나올 때마다 그의 모자를 통해 홍보했다. 판매는 폭발적이었다. 컨테이너가 도착하자 마자 나갔다. 그렇게 2년동안 진 빚을 갚았다. 집도 사고 자동차도 샀다. 사무실도 얻고 직원도 뽑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새로운 모자 개발에 들어갔다. 모자에 수를 놓아보자. 82년 내놓은 ‘자수’ 모자는 88년까지 인기를 끌었다. 그의 회사는 연간 1000만~2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5. 토마스 이름을 알리다= ‘토마스 C 프로모션(당시 회사 이름)’은 모자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조 회장의 영어 이름이 토마스다. 그는 쉴 줄 몰랐다. 다음으로 눈을 돌린 분야는 스포츠 모자. 먼저 야구 리그를 뚫었다. 뉴욕 양키스를 시작으로 미 전역 26개 야구팀의 모자를 납품했다. 농구, 풋볼, 아이스하키 등 각 프로 스포츠 리그 선수의 모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연 매출 1억달러를 달성했다. 모자 업계에서는 처음. 그게 1991년일이다. 1988년 설립한 도미니카 등의 공장 직원이 5000명, 뉴욕 사무실에는 50명으로 불어났다. 애틀랜타와 LA에도 세일즈 사무실을 오픈했다. #6. 사이즈에 주목했다= 하지만 다시 위기가 왔다. 1992년 쿼터제가 폐지되면서 값싼 중국 물건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중국의 저가 공세에 그의 모자가 밀렸다. 매출이 떨어졌다. 돌파할 또다른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는 모자 사이즈에 주목했다. 당시 모자 사이즈는 10가지. 재고 부담이 컸다. 원(one) 사이즈를 만들어보자. 고탄력의 스판덱스 소재를 사용하고 모자 뒷부분에는 머리 크기에 맞게 모자 크기를 조절하는 밴드 대신 신축성 좋은 소재를 사용하기로 한다. 특수 밴드를 모자 테두리에 댄 ‘플렉스 피트(Flex Fit)’였다. 플렉스 피트는 1994년 개발해 96년 첫 출시했다. 98년엔 특허 출원했다. 96년은 랩이 유행하던 때. 마침 랩퍼로 뜨고 있는 ‘LL 쿨 J’가 공연 때 플렉스 피트 모자를 쓰고 나왔다. 부탁한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당시 플렉스 피트 모자의 인기가 너무 높아 모자 도둑질이 극성을 부릴 정도였다. 플렉스 피트는 2년 정도 뜨겁게 달구웠다. 하지만 모자에도 유행이 있는 법. 98년쯤부터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서부 시장에서 반응이 왔다. #7. 마침표는 없다= 남가주는 서핑, 스노보드 등 액션 스포츠 발달이 잘 된 곳. 퀵실버 등 액션 스포츠 업체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프로 스포츠에서 액션 스포츠 시장까지 진출할 수 있겠구나. 시장을 키울 수 있겠구나. 2000년 LA에 지사를 세웠다. 사시사철 모자를 쓰는 동네. 여기가 바로 노다지구나. 서부 시장에 눈을 뜬 것이다. 그해 5월에 바로 LA인근 클레어몬트에 집을 샀다. 현재 ‘소네트/플렉스 피트’의 연간 매출액은 1억5000만달러. 그의 모자는 전 세계 안 들어가는 나라가 없다. 중국을 제외하고. 중국에 진출하면 바로 짝퉁이 나오겠지만 언젠가는 들어가야겠지. 그의 다음 야심작은 ‘210 피티드 캡(fitted cap)’이다. 플렉스 피트에서 한단계 업그레이드돼 밴드를 없애고 원단 자체의 신축성만으로 크기를 조절하는 모자다. ‘210’은 2개로 10가지 사이즈를 커버하는 한다는 의미다. 210 피티드는 이미 모자 시장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조병태 회장에게 ‘세상은 노다지’다. 그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그는 샘솟는 아이디어로 또 다른 모자 특허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그의 도전에 쉼표는 있어도 마침표는 없다. ◇조병태 회장은… - 1946년 11월 경북 영덕 출생 - 65~69년 경희대 체육관리학과 졸업 - 69~74년 중학교 교사, 핸드볼 선수 및 코치 - 1975년 도미 - 75~76년 유풍실업 뉴욕 지사장 - 76~현재 토마스 C 프로모션, 소네트, 플렉스 피트 CEO - 81~88년 세계핸드볼 연맹 국제심판 - 92년 전미 엘리스 아일랜드 메달 수상 - 96~98년 세계해외한인무역협회 회장 - 98년 대한민국 대통령상 수상 - 2001년 세계한인무역인 대상 수상 이재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9-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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